나희덕 시인의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시집 중에서 "못 위의 잠, 귀뚜라미" 두 편의 시를 전해드리니 시를 읽으며 행복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담고 싶은 시
못 위의 잠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 p28~p29
귀뚜라미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p69
함께 보면 좋은 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 - 인디언 기도문
도종환 - 담쟁이 / 꽃씨를 거두며 / 가을 사랑 / 우산
시를 읽고 나서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아비 제비가 제비집이 너무 좁아 박아놓은 못 하나 위에서 잠자는 모습, 실업으로 집 없이 어려운 시기를 보낸, 보내고 있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모습과 같다.
시인의 시를 통해 아버지가 짊어졌던 삶의 무게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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