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시인의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를 소개합니다. "슬픔이라는 구석, 지나가는 바람, 꽃비" 세 편의 시를 전해드립니다.
제목 :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저자 : 이병률
출판사 : 문학동네
마음에 담고 싶은 시
슬픔이라는 구석
쓰나미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
빈 공중전화부스 한 대를 설치해두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들어가
통하지도 않는 전화기를 들고
세상에는 없는 사람에게
자기 슬픔을 말한다는데
남쪽에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휴전선을 넘어 남하한 한 소녀는
줄곧 직진해서 걸었는데
촘촘하게 지뢰가 묻힌 밭을 걸어오면서
어떻게 단 하나의 지뢰도
밟지 않았다는 것인지
가슴께가 다 뻐근해지는 이 일을
슬프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나
색맹으로 스무 해를 살아온 청년에게
보정 안경을 씌워주자
몇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안경 안으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벅차서라니
이 간절한 슬픔은 뭐라 할 수 있겠나
스무 줄의 문장으로는
영 모자랐던 몇 번의 내 전생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단 한 줄로 요약해보자 싶어
시인이 되었건만
상대는커녕 밀려드는 것을 막지 못해
매번 당하고 마는 슬픔들은
무슨 재주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슬픔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 p14~p15
지나가는 바람
그때 난 인생이라는 말을 몰랐다
인생이라는 말이 싫었다
어른들 중에서도 어른들이나
입에 달고 사는 말이거니
어쩌면 나이 들어서나 의미를 갖게 되는
말인 줄로만 알았으며 나는 영원히
그때가 오게 되는 것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 오늘 나한테 인생이 찾아왔다
굉장히 큰 배를 타고 와서는
많은 짐들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제 앞으로는 그 많은 짐들을 짊어지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하나 풀어봐야 한다고 했다
좋은 소식 먼저 들려줄까
안 좋은 소식 먼저 전해줄까
언제나처럼 나에게 그렇게만 물어오던
오전 열한시였는데
예고 한 번 없이
인생이 여기 구석까지 찾아왔다.
- p21
꽃비
작은 새가 와서
벚나무에 앉더니
벚꽃을 하나씩 따서
똑똑 아래로 떨어뜨리네
새가 목을 틀어가며
꽃들을 따서 떨어뜨리고
눈물 떨어지는 속도로
뚝뚝 떨어뜨리는 것은
그 나무 밑에 사랑을 잃은
누가 하염없이 앉아 있어서겠지.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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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고 나서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단 한 줄로 요약해보자 싶어 시인이 되었건만 상대는커녕 밀려드는 것을 막지 못해 매번 당하고 마는 슬픔들은 무슨 재주로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슬픔이 밀려들 때는 온몸으로 막으려 해도 막을 수가 없다. 인생은 슬픔과 나란히 가는 것이 아닐까?
"오늘 나한테 인생이 찾아왔다. 굉장히 큰 배를 타고 와서는 많은 짐들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제 앞으로는 그 많은 짐들을 짊어지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하나 풀어봐야 한다고 했다."
삶 속에서 갑자기 큰 짐을 만날 때 우리는 인생의 무게에 짓눌리기도 한다. 삶은 그 짐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성숙해지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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