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인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시집 속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여백" 세 편의 시를 전해드립니다.
마음에 담고 싶은 시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가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턱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p38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몹시도 괴로웠다
어깨 위에 별들이 뜨고
그 별이 다 질 때까지 마음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게만 느껴지는 날에는
내가 그에게 처음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내가 그와 끝까지 함께하리라
마음먹던 밤
돌아오면서 발걸음마다 심었던
맹세들을 떠올렸다
그날의 내 기도를 들어준 별들과
저녁하늘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사랑도 다 모르면서
미움을 더 아는 듯이 쏟아버린
내 마음이 어리석어 괴로웠다.
- p51
여백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 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 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 p19
함께 보면 좋은 글
시를 읽고 나서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힘든 고난의 길이었더라도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 길들은 내가 지나와야 했던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고난이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었고 내가 지금 이 모습으로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움을 받치고 있는 것은 소리없이 존재하는 여백이다. 여백으로 말미암아 여백 앞에 서 있는 모든 것은 그 모습이 더 선명해진다. 마음도 번잡한 생각으로 꽉 차 있는 사람보다 텅 빈 고요함이 있는 사람이 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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