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집 속 "겨울 엽서, 땅, 개망초꽃" 세 편의 시를 전해드립니다. 시와 함께 행복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담고 싶은 시
겨울 엽서
쫓겨난 교문 밖에서
세 번째 겨울을 맞습니다
그대의 하늘 쪽을 바라보는 동안
이 엽서에 퍼담을 수 없을 만큼
눈이 내렸습니다
보고 싶다는 말만 쓰려고 했습니다
눈 덮인 학교 운동장을
맨 먼저 발자국 찍으며 걸어갈 아이를
멀찍이 뒤에서 불러보고 싶다는 말은
정말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사랑이여
그대와 나를 합하여
우리라고 부르는 날이 다시 올 때까지는
나는 봄도 기다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 p117
땅
내게 땅이 있다면
거기에 나팔꽃을 심으리
때가 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랏빛 나팔 소리가
내 귀를 즐겁게 하리
하늘 속으로 덩굴이 애쓰며 손을 내미는 것도
날마다 눈물 젖은 눈으로 바라보리
내게 땅이 있다면
내 아들에게는 한 평도 물려주지 않으리
다만 나팔꽃이 다 피었다 진 자리에
동그렇게 맺힌 꽃씨를 모아
아직 터지지 않은 세계를 주리.
- p29
개망초꽃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돌길에 무더기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 p87
함께 보면 좋은 글
시를 읽고 나서
"내 아들에게는 한 평도 물려주지 않으리. 다만 나팔꽃이 다 피었다 진 자리에 동그렇게 맺힌 꽃씨를 모아 아직 터지지 않은 세계를 주리."
자녀에게 눈에 보이는 것을 물려주기보다, 보이지 않는 꽃씨 속에 품고 있는 세계를 주겠다는 시인의 마음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부모가 자식에게 많은 것을 물려주는 요즘, 그래서 홀로서기가 오히려 힘들어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요즘이기도 하다.
홀로 서서 세상을 펼쳐가는 힘을 주는 것이 어쩌면 자식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더 필요하지 않을까?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마음속 아름다운 세계를 물려받는 자녀는 더없이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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