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시인의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시집 속 "얼굴, 부산역, 세상의 끝" 세 편의 시를 전해드리니 시를 읽으며 아름다운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담고 싶은 시
얼굴
하루 한 번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신 얼굴 때문입니다
당신 얼굴에는 당신의 아버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갑니다
어머니도 유전적으로 앉아 있지만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누구나 그렇듯
얼굴만으로는 고아입니다
당신이 본 풍경과 당신이 지나온 일들이
얼굴 위에서 아래로 차곡차곡 빛납니다
눈 밑으로 유년의 빗금들이
차분하게 지나가고
빗금을 타고 표정은 파도처럼
매번 다르게 흐릅니다
얼굴은 거북한 역할은 할 수 없습니다
안간힘 정도는 괜찮지만
계산된 얼굴은 안 됩니다
바다의 얼굴을 보여주세요
당신 얼굴에
나의 얼굴을 닿게 한 적이 있습니다
무표정한 포기도 있는 데다
누군가와 축축하게 헤어진 얼굴이어서
그럴 수 있었습니다
당신 앞에서 이유 없이 웃는 사이
나는 당신 얼굴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얼굴에 얼굴을
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루 한 번 당신과 겹쳐지는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p22~ p23
부산역
막차를 타야 할까 타지 말아야 할까
고민하는 깊은 밤
역 앞에서 바람을 맞으며 서성이고 있는데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책장을 나부끼고 있다
언뜻 보기만 해도 책장 사이로 낙엽이
들어가기도 했다가 나오기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책을 주워 들었다
우수수 낙엽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나는 책을 조금 오므렸다
이미 책장 사이로 꽂힌 낙엽들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낙엽들을 읽기 위해
나는 조금만 더 밝은 곳이 필요했다
막차를 타지 않고 부산에 남기로 했다.
- p120
세상의 끝
병실에 누워 있는 당신이
당신은 아프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기운 하나 없이 누운 채로 당신은
어렵게 목에도 힘을 모으더니
너를 생각하면 내가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어렵게 시작했다 급히 사라지려는 봄이
창밖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꽃들에게도 너가 있거나 내가 있어서
아플까 싶은데
당신은 무엇도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 p121
함께 보면 좋은 글
시를 읽고 나서
"당신이 본 풍경과 당신이 지나온 일들이 얼굴 위에서 아래로 차곡차곡 빛납니다."
그 사람이 살면서 바라본 세상과 지나온 일들은 얼굴에 다 물들어 있다. 한 곳은 기쁨으로 한 곳은 슬픔으로 또한 사랑과 아픔으로. 그 모든 것이 그 사람이 되어 우리 눈에 비치는 것이다.
"어렵게 시작했다 급히 사라지려는 봄이 창밖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꽃들에게도 너가 있거나 내가 있어서
아플까 싶은데 당신은 무엇도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니 마음이 아련해진다. 힘들게 시작해서 짧게 끝나는 사랑. 급히 사라지려는 봄이 창밖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방문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구독, 하트 부탁드려요~♡
'시집 추천 > 사랑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버드나무 정원 - 사랑은 시처럼 온다 시집/외국 시 (24) | 2021.12.12 |
---|---|
시집 추천ㅣ칼릴 지브란 사랑의 시 (24) | 2021.12.05 |
시집ㅣ김춘수 - 꽃/구름과 장미/또 하나 가을 저녁의 시 (37) | 2021.11.24 |
사랑 시집 추천ㅣ손종일 - 죽어서도 내가 섬길 당신은 (28) | 2021.11.21 |
시집ㅣ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 - 신현림 (48) | 2021.11.03 |